나해 11월 18일 비폭력
폴란드 국경에 수천 명의 난민들이 오도 가도 못하며 추위와 배고픔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데 그런 고통을 겪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전쟁은 정말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폭력은 정당화되지 말아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폭력이 미화돼서는 안 된다. 물리적인 폭력은 말할 것도 없고 언어적인 폭력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서로 어색하고 불편해도 인내하며 견디어야 한다. 폭력은 우리에게 재앙이고, 하느님께는 큰 슬픔이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우셨다. 당신이 겪으실 수난과 죽음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을 모르고(루카 19, 42), 하느님이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 44).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비폭력으로 맞서라고 하셨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거룩하고 완전해진다. 그런 것들이 예수님께는 어렵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어렵다. 사소한 말다툼에서도 과거 쌓였던 것들까지 모두 끄집어내며 서로 상처를 주는데 그를 사랑하고 기도하고 인내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성적인 생각과 의지력만으로는 따르기 불가능할 것 같은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불의하게 폭력적으로 희생당하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사랑과 비폭력을 외치셨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고 폭력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런데도 그것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분을 그렇게 폭력적으로 다루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상처 입은 몸에서 인간의 바꾸지 않으려는 아집과 오만 그리고 잠재된 폭력성을 본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그런 것들이 밖으로 낱낱이 다 드러났고 우리가 모두 알게 됐다. 내 안에도 그런 아집과 오만 그리고 폭력성이 있다.
부부와 가족사에 말다툼을 하더라도 절대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한다. 속으로는 그런 말로 쏘아붙이고 싶고 그런 대화 장면을 상상하고 연습까지 했지만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경험상으로도 그 끝은 언제나 재앙 수준의 상처뿐이다. 그것이 폭력의 결과다. 때리면 다친다. 모두가 다 상처받고 아프다. 참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이웃사랑이다. 어쩌면 용서만큼 최고의 이웃사랑일지 모른다. 참을 수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처음부터 침묵하는 것도 사랑이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난 마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몸의 상처를 닮았다. 우리는 그렇게 치유 받고 평화를 유지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이루어간다.
예수님, 평화를 이루는 길은 험난합니다. 하지만 그 수고와 고생은 폭력이 주는 상처와 고통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서 살게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게 저를 꼭 붙들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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