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9월 19일 더러워지지 않는 하느님

이종훈

9월 19일 더러워지지 않는 하느님

 

바리사이는 ‘분리된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준수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는 죄인들의 무리에서 분리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다고 자부했던 것 같다. 반면에 다른 일반 서민들은 그렇게 살 수 없어서 구원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바리사이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자들(요한 7,49)’이라는 비난과 무시를 당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잘 안돼서 속상하고 괴롭다. 교회법과 교리 그리고 신학적인 이론들은 잘 몰라도 어떻게 해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지 잘 안다. 거의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아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거의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당연히 그것을 감추고 속으로도 애써 모르는 체 하는 것이지 않을까?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도 만만치 않은 데 거기에 감추고 가린 그 무거운 마음의 짐까지, 게다가 티 나지 않게 짊어지고 살려니 사는 게 참 힘들고 버겁다.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엄격한 율법준수와 철저한 금욕생활로 죄인들에서 분리되어 그들에게 물들지 않은 깨끗한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했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렇게 엄격하고 철저하게 살면 완전히 깨끗해지나? 아닐 것 같다. 죄는 자동적으로 저질러진다. 안 하려고 해도 하게 되고, 하고 싶지 않아도 어느새 또 그렇게 돼버린다. 내가 더러워서 그런가? 그리고 그렇게 더러운 나는 순수하고 깨끗하고 존귀하신 예수님을 더럽히면 안 되니 가까이 가면 안 되나?

 

아니다. 그 반대다.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아니 그분을 만지고 그분을 먹고 마셔야 한다. 그분은 내가 당신을 찾기보다 먼저 나를 부르신다. 동구 밖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매일 기다리신다(루카 15,20). 나는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다쳐서 아프고 먹지 해 배고프다고 보신다. 나의 죄스러움이 그분을 더럽히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깨끗함이 나를 씻어 낫게 한다. 나는 또 다치지만 그분은 나 때문에 더러워지지 않는다. 그분은 나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느님이시다.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그렇게 큰 확신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나는 나를 깨끗이 씻을 수 없다. 하느님 앞에 더러운 죄인은 없다. 배고프고 다쳐 아파하는 당신의 자녀만 있을 뿐이다. 세상 모두가 끝까지 그를 단죄하고 저주해도 그가 하느님을 찾고 청한다면 그는 하느님 앞에서 깨끗해지고 하늘나라까지 훔쳐 들어간다(루카 23.42-43).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말이다.

 

예수님,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여인은 어디선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주님을 찾아왔지만 존귀하신 당신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없어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발을 닦고 거기에 그 비싼 향유를 부어 발라드렸습니다(루카 7,37-38). 다른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하지만 주님은 그를 안쓰러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확인시주셨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 바리사이들은 믿을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깨끗해지는 법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불만이었겠지요. 그들이 옳았습니다. 그런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늘에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이 땅으로, 내 마음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저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그 힘센 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청하오니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믿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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