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9일 하느님은 아신다.
다윗이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나의 죄를 잘 알고 있고 그 죄는 늘 내 앞에 있다(시편 51,5). 그렇다고 내 죄를 온 세상에 떠벌리고 싶지는 않다. 감추고 또 감추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위선은 아니어야 한다.
소독약이 상처의 중심에 닿을수록 더 아픈 것처럼 죄의 뿌리를 드러내려 할수록 마음뿐만 아니라 온 몸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하지만 그 뿌리를 온전히 드러낼 수도 뽑아버릴 수도 없다. 나의 죄는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 늘 내 안에 있다. 죽는 날까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 것이다. 가장 깊은 뿌리에는 자애심과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죄인이지만 악한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 누가 하느님을 아프게 슬프게 해드리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겠나? 그런데 결과는 늘 그렇게 되어 버린다. 하느님께 죄송하지만 나 또한 억울하다. 그러려고 그런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이기심과 상처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다.
율법은 죄를 고발하지만 없애지는 못하고 치유도 못한다. 죄를 인정하다고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율법학자들의 말처럼 하느님 한 분만이 나의 죄를 없애주실 수 있다(마르 2,7). 들것에 실려 지붕에서 내려진 그 중풍병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용서해달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몸과 눈이 전하는 마음을 들으셨고 그 즉시 그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자애를 베푸셨다(마르 2,5).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은 바로 이 분이시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지도 못하지만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잘 아시고 그렇게 하신다.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저희 위에 당신의 자애를 베푸소서(시편 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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