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7일 수고의 의미
예수님은 당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고 그 길로 곧장 나아가셨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수차례 말씀하지만 그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니 몇 번을 들어도 수수께끼처럼 들렸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4-5)”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물론 토마스이고 나다. 고통과 고난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도 수고하고 고통을 겪는다. 사는 건 고통이다. 어머니 태 안에서부터 출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먹고 사는 일과 사람들과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 그리고 질병과 죽음의 고통까지 겪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장수는 축복이 아니다. 그런데도 장수를 기원함은 고통스러운 삶을 넘어선 어떤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바람이다. 나의 이런 수고와 고통이 어떤 의미를 갖기를 그리고 나에게 참된 어떤 것으로 보상해주기를 바람이지 않을까?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성공과 행복만을 바라는 마음이 진정한 고통의 원인일는지 모른다.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니 혼란스럽고 갈등을 겪는 것은 아닐까?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치러야할 대가를 치르면 몸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마음은 평화로울 것이다.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다. 버려야 할 것을 계속 갖고 있고 짊어져야 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사는 게 어색하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버리고 또 짊어지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하지 않으셔도 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지 않으셔도 될 죽음의 길을 가셨다. 참 고맙다. 삶은 수고다. 악행도 선행도, 하느님 편에 서도 그 반대편에 서도 수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수고가 나의 구원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이웃의 구원에 도움이 되면 좋지 않을까? 그 길을 주님께서 열고 보여주셨다.
나의 길이신 예수님, 버려야 할 것과 짊어져야 할 것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언제나 유혹에 시달리니 마음이 흐려져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세계까지 내려가셨던 주님 사랑에 대한 신뢰로 저의 흐려진 눈을 맑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길의 인도자이시니 제 발걸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