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용서(연중 24주일, 9월 17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는 인간의 행위는 용서입니다. 그와 동시에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지켜 본 율법학자 몇 사람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라고 속으로 한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하느님만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마태 18,21) 가르치신 것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가 봅니다.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유태인 여성에게 ‘독일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나는 복수심으로 내 인생을 파멸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내 인생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우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범죄를 모의하는 마음보다 적개심과 복수심이 더 빨리 그리고 철저하게 파멸시킴은 굳이 증명해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크고 작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첫째 수혜자가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인 것처럼, 용서의 은혜를 입는 첫째 사람도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살기 위해서 용서합니다.
타인의 잘못으로 실제적으로 손해를 입었다면 소송을 통해서 반드시 잘잘못을 가리고 그 손해를 보상받고 실추된 명예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권력자들의 비겁한 행위와 잘못된 사회 통념 등으로 이런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됩니다. 그들을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피해자들을 회복시켜주기 위함이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생활에서 우리를 병들게 하는 크고 작은 복수심의 대부분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실수, 오해, 무지, 서로 다른 생활방식 등에서 생기는 상처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법적 소송은 물론이고 말로 풀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고 용서하려해도 용서되지 않아 괴로운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를 통해서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기억하고 또 믿는 것입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그 매정한 종이 진 빚 만 탈렌트는 오늘날의 수조 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하느님께 우리가 그런 빚을 진 신세임을 상기시켜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임금은 그 종에게 그도 자신처럼 이웃의 빚을 탕감해주라고 분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매정한 행위가 알려지자 그에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하며 크게 나무랍니다. 그것은 말해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임금의 소리 없는 분부였던 것 같습니다. 가슴에 새겨져 지울 수 없는 계명이었나 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수 조원의 빚을 탕감 받은 행운아라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시끄러운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분노, 적개심, 복수심으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에서 여린 바람결에 실어 보내시는 단순하고 소박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집회 27,3-5)?” 분노로 가려진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 없고,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시끄러운 곳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니 용서도 없습니다. 적개심과 복수심은 상대방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는 더 깊어져 갑니다. 여기서 해방되는 길은 자신이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 받았고 앞으로 그럴 것임을 믿고, 그가 아니라 소중한 나의 영혼을 위해서 그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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