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만지는 자리연중 33주일, 세계 가난한 이의 날)
예수님은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려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셨고, 병자들과 악령에게 시달리며 고생하는 이들을 치유해주셨습니다. 마치 당신이 그들의 채무자인 것처럼, 그들의 종인 것처럼 그들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그들 안에 사시기로 결정하셨고 앞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사람들은 주위의 가장 작은이들에게 그렇게 해주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40).
왜 가난한 사람이 생기는 걸까요? 하느님이 세상을 부족하게 만드셔서 그런 것은 아니라 인간의 탐욕으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층 간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보고서에서 보니 세계 1%의 부자가 세상 모든 재화의 50%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난은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그 외의 영역에도 수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고통, 소외, 억압, 폭력, 고문과 옥살이, 전쟁, 자유와 존엄의 박탈, 무지와 문맹, 응급 의료 상황과 일자리 부족, 인신매매와 노예살이, 망명, 극빈과 강제 이주의 모습으로 도전합니다(세계 가난한 이의 날 프란치스코 교종 담화 5항).’ 극소수의 탐욕과 대중의 무관심이 인간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가슴 아픈 일을 만들어냅니다. 보도매체를 통해 그런 기사를 접하면 열어보지만 차마 다 읽어 내려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저도 이런데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더 아프시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매일 목격하신 예수님은 매우 마음 아프셨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가난 구제를 위해서 어떤 조직이나 기관을 만들지 않으셨고, 권력자와 부자들과 손을 잡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몇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당신이 어떻게 일하시는 지 보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사랑하면 그들에게 종처럼 행동하게 되는지 알려 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셨지만 지극히 낮아지셔서 종처럼 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6). 그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도 당신처럼 완전히 가난해져서 자신마저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9,23).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도 거의 다 청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 가난한 자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포함해서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보십시오, 세상 떠날 때 아무 것도 가지도 가지 못하지 않습니까? 내 몸과 재화를 잠시 빌려 쓰고 있고, 관리하고 있는 것뿐입니다(루카 16,9).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해지셨지만 그 대신 당신을 완전히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고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지셨습니다. 속옷까지 다 빼앗겨 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그분은 인류의 임금이 되셨습니다(담화 7항).
봉사나 선행을 해 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진리가 있습니다. 내가 베푼 선행과 봉사의 첫 번째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만 사실 가난한 자신을 돌보는 셈입니다. 그리고 소유가 얼마나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지, 사는 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자꾸 더 갖고 싶은 것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재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하니 쓸데없는 짐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엉뚱한 곳에서 만족, 안전, 행복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참 행복의 길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따르고 섬기려는 이들을 가난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초대하십니다. 복지사업에 투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만나자는 초대입니다.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면 숨 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은 고통이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팔을 내릴 수도 못 박혀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발에 힘을 줄 수도 없어 고통과 괴로움 그 자체인 상태였을 겁니다. 가난한 우리 이웃들이 당하는 고통이 그런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안 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출발점이 다르니 앞서 뛰어 날아가는 이들을 따라잡을 수도 없습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 받으신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과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그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라 무죄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내리고 그분을 무심히 올려다보는 이들의 탓이라고 알려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보잘 것 없는 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고 만지게 하시는 것처럼 우리 주위 곳곳에서 우리를 불러 그분들을 만나고 그 상처를 만지게 하십니다. 아니 당신을 만나고 당신의 상처에 손을 대게 하십니다. 우리는 가난을 없애지는 못하겠지만, 가난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나눔으로써 복음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키울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우리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들입니다(담화 9항).’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탈렌트를 받았습니다. 좋은 옷이라고 아껴 입다보면 옷장 속에서 망가지거나 유행에 뒤쳐져 못 입게 됩니다. 소중한 것이라 땅에 묻어두지 말고 자꾸 써먹어야 합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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