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7일(성주간 화요일) 새로운 삶
삶과 죽음의 경계를 다녀 온 사람은 있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다. 라자로도 그 과부의 아들도 되살아났지만 다시 죽어 묻혔다. 생명과 죽음, 선과 악, 하느님과 죄는 함께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은 돌아가셨고 묻히셨다. 인류의 죄가 되신 분은 하느님과 함께 계실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그분은 죄를 지어 죄인이 되신 것이 아니라 죄 그 자체가 되셔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셨다. 빛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셨으니 어둠은 어디에 자신을 숨길 수 있었겠나? 세상의 어떤 사람이 죄인을 위해서 희생하겠나? 누가 스스로 죄가 될 수 있나? 아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그분이 가는 길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죽음은 삶의 완결이다. 예수님에게는 죽음도 지상 사명의 일부였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스승의 수난과 죽음에서 아무런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예수님은 그 때문에 너무 괴로우셔서 참지 못하고 속내를 드러내셨다(요한 13,21). 그가 마음을 바꾸기를 혹은 조금만 더 참기를 바라시는 마지막 요청이었을까? 예수님의 괴로움은 그의 배반이 아니라 그가 당신에게서 떨어져나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떨어져나갔고 하느님도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을 몰랐고, 예수님은 그를 아셨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대로 그는 스승을 부인했다. 괴로워 슬피 울었지만 남아 있었다.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스승 곁에 붙어 있었다. 스승의 수난과 죽음에서 의미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의 시작점에서 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셈이 되었다. 그는 스승이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하늘나라의 길을 열어주시기까지, 새로운 삶을 깨닫게 해주시기까지 지독한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죽음은 두렵지만 그렇다고 죽지 않고 이렇게 계속 사는 것은 끔찍하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허망하게 보였을 것이다. 거기서 희망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분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절망이었을 것이다.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데 전기가 나간 것 같을까? 영상은 사라졌지만 감동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스승은 분명 돌아가셨지만 이게 끝이 아니기를 바랐을 것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는 없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빛을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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