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제2의 모세?
사랑은 이타적이라서 그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고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그로 인해 내가 기쁜지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무르지 않게 하고(요한 5,38), 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아신 것(요한 5,42)은 그들이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했다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했을 것이고 그것을 따랐으며 그로 인해 예수님은 기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그것은 그분의 신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기뻐하실 일만을 찾고 실천하셨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완전한 사랑이 사람들의 모든 거짓과 위선의 갑옷을 벗기고 손에 꼭 쥐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드셔야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세상구원이었다. 지독히 이기적인 인간이 아무런 보답과 대가 없이 선행을 베풀고 그를 좋아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없는 호의와 친절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셨다(로마 2,4). 예수님의 호의와 친절의 종합이고 절정이 대속적 죽음, 십자가의 희생이었다. 아들까지 희생시키는 이보다 더 무모할 수 없는 아버지의 하느님의 결심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이 세상에는 물론이고 저 하늘 위에도 없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셨다. 이를 보고도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느님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으실 것이다. 더 이상 보여주실 패가 없다.
성경은 예수님을 제2의 모세라고 소개하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설득력 있는 시도이다. 모세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다.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을 넘어 그분을 설득하고 훈계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탈출 32,11-14). 하느님이 그에게 설득당하고 그의 훈계를 듣고 마음을 바꾸셨을 리가 없다. 그것은 아마 모세 자신의 마음이 바뀌는 과정을 표현한 것 같다. 이 목이 뻣뻣한 백성, 조금도 참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신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백성, 마치 자신이 주인인양 하느님께 요구하는 버릇없는 이 백성에게 약속의 땅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끝내버리자고 하느님께 청했을 것 같다. 그런 모세를 하느님은 진정시키고 달래서 그 어린 백성들을 다시 사랑하고 잘 데리고 가라고 가르치셨을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런 백성들을 사랑하셨다.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분이 어떻게 제2의 모세가 되겠는가? 그분은 처음부터 우리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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