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가톨릭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고, 한 곳에 모일 수 있으며, 거기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친절, 배려, 희생은 만국 공통어이다. 이것들의 근원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이 하느님과 진리가 아닐 때 그 사랑은 편협하고 배타적이 될 수 있고 때로는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과 폭력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도시 예루살렘 밖으로 몰아내서 살해했다. 권력을 쥔 교회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이름은 많은 폭력을 휘둘러서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켰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진리에 자신을 맡기지 않았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도시에서 하느님을 몰아냈고, 하느님을 섬긴다면서 하느님이 몸소 그들 안에 사시는 약한 이들을 살해했다. 그들은 왜 그런 오류에 빠지고 모순되는 행동을 거룩하다고 여기게 된 것일까?
아마 교만과 오만이었을 것 같다. 자신만이 하느님을 알고 진리 안에 있다는 오만이다. 하느님의 말씀에 정반대되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유혹이 되지 못한다. 유혹은 하느님과 비슷한 것에서 비롯한다. 인류의 첫 죄는 그들이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창세 3,5)’ 유혹에 빠진 때문이었다. 뱀이 말했고 우리들이 생각했던 하느님은 힘이 세고, 모든 것을 다 알아 언제나 옳은 일만 해서 모든 이들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셨다.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우리는 그런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가? 매우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겁난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으로 쫓겨나셨고,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셨다. 하지만 그걸 누가 알았겠는가? 하늘나라 씨앗이 바로 거기 십자가 밑에 뿌려질 것을. 오늘도 우리는 온 몸에 십자가를 긋고, 목에 십자가를 걸고 손가락에 십자가를 끼운다. 우리도 그분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 그분처럼 힘세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그분과 함께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