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10월 16일(성 제라도 마옐라 축일) 단순함(+ 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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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6일(성 제라도 마옐라 축일) 단순함

 

어느 날 병원 원목실에서 일하시는 수녀님들과 병원사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원목 사제는 똑똑한 사제보다는 마음씨 착한 사제여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수녀님들은 전적으로 동의하며 맞장구를 쳤다. 아픈 사람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의료적인 도움은 물론이고 심리적이고 영적인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그런 일을 잘 한다.

 

오늘은 나의 선배이자 형제인 제라도 성인 축일이다(1726-1755). 성인은 창립자 알폰소 성인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 수도생활이라고는 고작 5년 남짓이고 사제가 아닌 평수사로 사목했고 튼튼하지 않았지만 성인에게 얽힌 놀라운 일화들이 참 많다. 창립자인 알폰소 성인마저 당황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던 일이 있을 정도다. 성인은 어머니들의 수호성인이다. 특히 안전한 출산을 돕는 분으로 유럽과 북미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고해자가 고해를 잘 할 수 있게 도와준다. 고해소는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난임으로 힘들어하는 부부들과 위험한 출산을 앞둔 엄마들이 성인에게 전구를 청해서 무사히 출산하는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조카와 그의 아이도 그랬다.

 

배움도 짧고 입회 허락을 간신히 받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수도생활도 그렇게 짧았는데 그는 성인품에 올려졌다. 그리고 오늘날 여전히 우리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 그것은 어찌 보면 유치하고 무모할 정도로 예수님처럼 살기를 바랐던 성인의 지극히 단순한 마음 때문일 거다. 입회 전 사순절에 본당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연극을 하면 십자가에 매달리는 예수님 역할은 늘 그의 몫이었고, 수도회에 입회해서는 자꾸 성당에서 자는 바람에 원장 신부님께 꾸지람을 듣곤 했다. 감실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랬다. 마지막에도 예수님처럼 십자나무 위에 매달려 홀로 버려져 죽고 싶은 나머지 마지막 꾀를 부려 간호 수사에게 목이 마르니 물 좀 갖다 달라고 청해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홀로 세상을 떠났다. 그 밖에 사목활동에서 성인에게 얽힌 놀라운 일화들은 모두 성인이 예수님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고 싶은 어린이 같은 단순성에서 비롯한 것 같다.

 

성인이 추문으로 고발되었을 때 그 당시 원장이던 알폰소 성인은 화를 내며 그의 모든 사목활동을 중지시켰다. 그것은 그에게 죽음과도 같은 벌이었다. 그런데 성인은 항변하지 않았다. 후에 그게 모함이었음이 밝혀지고 알폰소 성인이 그에게 왜 항변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수도회 규칙에 그런 일이 벌어지면 침묵하라고 되어 있다고 대답해서 법률가 출신의 창립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 또한 권력자들의 모함과 십자가에 매달라는 사람들의 아우성에도 대항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랐던 예수님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었다.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성인의 그 단순한 마음이 오늘도 힘을 발휘하며 전구를 청하는 모든 이들을 도와주고 계신다고 믿는다.

 

똑똑한 사목자는 한두 명이면 충분하다. 지식은 인터넷에 다 있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눈부시고, 법과 제도는 날로 좋아지며, 좀 더디지만 시민의식도 계속 성숙해진다. 이제 사목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마음이다. 구속자이신 예수님이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이다. 가난하고 가장 작은 이들에게 집과 음식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영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하다.

 

주님, 이것저것 너무 많이 재고 따지다 보니 주님의 따뜻한 마음을 자꾸 빼앗깁니다. 영리해서 손해 안 보는 것보다는 세상사에 어리숙해서 좀 손해 보고 잃어버리더라도 주님의 그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게 저에게는 훨씬 이득입니다. 오래 살고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한두 해라도 주님의 마음으로 일하는 게 더 거룩합니다.

 

제라도 선배님, 주님을 닮으려는 선배의 그 단순하고 거룩한 마음을 전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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