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겨울 첫눈 오는 날,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눈싸움을 하다가 왼쪽 눈 주위를 크게 다쳤습니다. 양호실에서 응급처치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이불 빨래를 힘겹게 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얼마나 다쳤니? 얼마나 아팠니?’ 하며 위로해주실 줄 알았는데 나의 기대와 정반대로 짜증 섞인 말투로 저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곧장 병원으로 가서 서너 바늘 정도 꿰맸습니다. 마취 없이 꿰매서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 모습을 어머니는 옆에서 지켜보셨습니다. 치료를 끝낸 후 어머니는 포도 통조림을 사주시며 그제야 저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날의 일은 어머니와 지낸 50년의 세월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분께 위로받지 못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장면과 과정 그리고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당연히 위로를 받으리라 기대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꽤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보니 부모도 부모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 다행히 그때의 어머니의 냉랭함에 대한 상처는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걱정거리와 다른 집안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상태이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놀이터에서 잘 놀던 아이들이 엄마가 놀이터에 나타나면 놀이를 그치고 엄마에게 달려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고자질이기도 하고, 자랑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엄마의 인정, 사랑, 위로, 지지, 격려 등입니다. 대부분의 엄마는 아이를 안아주며 ‘그랬어? 그랬구나. 이따가 엄마가 혼내줄게.’ 라고 대답하며 아이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해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친구들과 다시 놀이를 시작합니다. 만일 그때 엄마가 사리분별을 하며 아이의 잘잘못을 깨우쳐주는 등 사실관계 증명과 교육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아마 십중팔구 아이의 마음은 얼어붙게 될 겁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잘못과 약점 같은 부정적인 면을 찾고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의 잘한 것과 장점 등 긍정적인 면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정하고 긍정하는 것보다는 깎아내리고 부정하는 일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아마도 치열한 경쟁사회구조가 빚어낸 상황인 것 같습니다. 신나게 남의 뒷이야기를 하고 나면 자신의 옹졸함에 대한 실망과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그런 경험을 수없이 했으면서도 너무나 쉽게 또다시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원죄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워 보이고 때론 불가능하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셨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분 자체가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죄만은 지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세례, 즉 회개했다는 또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표지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았던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했지만(마태 3,14), 그분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죄를 씻는 그 물에 들어가심으로써 그분은 기꺼이 죄인들의 무리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시편 103,12)”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의로움의 총체였으며 예수님의 선교 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지만, 그분은 죄를 지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죄를 씻는 예식을 치르셨습니다. 교부들은 그분이 그 물에 들어가심으로써 그물이 정화되어 그 예식을 행하는 사람은 정말로 죄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게다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은 죄인들의 무리와 함께 어울리시고 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 당신을 내어 놓으신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이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은 어떤 것일까…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지,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지 살펴보게 됩니다.
남의 약점을 찾기는 쉬우나 장점을 찾는 것은 어렵습니다. 단죄는 쉬우나 용서는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단죄하고 공동체에서 제외하고 싶은 죄인에게서 예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포기한 그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 끄지 않으셨습니다(이사 42,3). 자기 자신도 포기하고 싶은 이를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희망의 불씨를 그분은 보십니다. 그래서 언제나 용서하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제가 다쳤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아무리 좋은 부모도 자식이 귀찮아질 때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이사 49,15).
자신 안에서는 그리고 세상 안에서는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은 오직 하느님을 신뢰할 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완전한 사랑은 당신이 세례받으신 후 들은 아버지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이 말씀은 그분이 세상에서 살게 하고, 다시 일어나 걷게 하고, 십자가의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을 겁니다. 그분이 들으셨던 그 말씀을 우리도 듣고 싶습니다. 부모의 입으로, 배우자의 삶으로, 친구와 이웃의 위로와 격려로 그리고 모르는 이의 작은 친절로 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큰 죄입니다.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돌봐드리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볼 수 없는 희망의 불씨가,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큰 사랑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만일 아니라면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격려는 무의미할지 모릅니다. 나의 것을 내어주고 나누고, 남의 짐을 지어주면서 우리는 모두 풍요로워집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도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그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힘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잠시 중단했던 놀이를 다시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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