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혼자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식사 전 기도를 하고 그 기도 내용을 반추하며 그 기도의 의미들을 되새겼습니다. 밥 한술을 떠먹으며 이 음식을 만들어주신 분, 곡식과 다른 반찬거리들을 재배해주신 분들께 새삼 고마운 맘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고마움이 곡식들과 나물들, 물고기와 고기들 자체에 대해 고마움으로 이어졌는데, 그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저처럼 살아 있는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죽어서 저를 살게 해주고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의 모습들이 떠올라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깊은 고마움으로 잠시 먹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과연 그들이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나는 그들의 희생에 대해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하는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필요했다면 나의 삶은 의미와 고귀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고귀했다면 나의 삶은 그보다 더 크고 거룩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 안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하신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지식과 재주가 아니라 당신의 삶 전체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은 그것의 결정적인 표징이고 완성이었습니다. 그분은 용감하셨습니다.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게다가 유력하고 명망이 있는 집안도 아닌 가난한 목수 아들의 신분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하며 의심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그 은총의 말씀들은 누구나 알고 말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구약)성경에 적혀 있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착한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들이 특별하고 은혜로웠던 것은 그분은 성경에 적혀 있고 당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렇게 하실 것이고, 때가 되면 목숨까지 바쳐서 그 일들을 모두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곧 성취였습니다.
그분은 당신 말씀대로 사셨고,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믿음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또다시 살고 계십니다. 그분의 희생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매일 희생되는 수많은 생물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의 고귀한 품위를 얻어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계획과 속마음을 모두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친구가 되려면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수많은 피조물의 희생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의 영은 언제나 우리가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우리의 양심을 아프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귀나 머리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그 말씀을 꼭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분이 세상에 계실 때와 똑같습니다.
세상은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살길인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그것을 말하기를 주저합니다. 말하면 곧 실천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고달픕니다. 우리의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게서는 자신을 벼랑에서 떨어뜨리려 했어도 그들을 물리치시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돌아가셔야 할 곳은 십자가 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런 용기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8-19).”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고 다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세상 앞에서 떨지 말아야 합니다. 그랬다가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두려워 떨며 더 비겁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겪는 이들은 선을 행하면서 자기 영혼을 성실하신 창조주께 맡겨야 합니다(1베드 4,19).” 주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면 뒤이어 굳센 희망이 솟아 기쁨을 주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의 선행과 애덕이 위대함이 결국 밝혀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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