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 (연중 16주일, 7월 23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알려주시려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 혹은 다스림이란 눈으로 볼 수도 없거니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언제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상대방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것을 알려줄 때 ‘예를 들자면, … ’하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농사일, 식물이 자라는 과정,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을 예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로 자라서 새들이 그 안에 몸을 숨기고 집을 마련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그 나라로 들어가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들은 이웃들에게 그들이 지닌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면서 그 이웃들도 같은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고, 적은 양의 누룩으로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악한 일이 더 많이 벌어지는 것 같고, 착한 사람들과 무죄한 이들이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몽상가나 이상주의자가 아니어서 이런 현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원치 않지만 이 세상에 악인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세상 모든 것,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인데 어떻게 악이 있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철학자, 신학자들이 나름 설명했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도 그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궁금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러 비유 말씀 중에 밭의 가라지 이야기만 더 설명해달라고 했습니다(마태 13,36). 왜 세상에 악이 있는지, 우리는 성장 초기의 밀과 가라지를 잘 구분 못해서 그렇다 치고, 그 씨부터 알고 계신 하느님은 왜 그것을 처음부터 뽑아버리지 않으시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세상 이야기를 듣다보면 속상하고, 마음 아프고 또 화도 납니다. 불공평하고 불의한 일들, 악한 사람들이 넉넉하고 뻔뻔하게 잘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화가 납니다. ‘왜 하느님은 저들을 벌하시지 않는가? 하느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아니 하느님은 정말 계시나?’ 하며 화를 냅니다. 그 때는 저의 그 분노가 의로움에서 비롯한 것 같습니다. 이런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그 세상 한 가운데에서 이런 일들을 지켜보시며 괴로우실 하느님의 마음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분의 바람은 모든 이들이 회개해서 당신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 5,45).” 그분이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것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불의한 세상에 분노하는 자신이 의로운 것 같지만 그 뿌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열등감, 상처 그리고 자신도 저렇게 맘껏 누리고 살고 싶은 헛된 욕망 때문입니다. 의로운 마음이었다면 상처받은 하느님의 마음을 눈물로 위로해드렸을 것입니다. 의인은 분노하지 않아도 여전히 의인이고 마지막까지 그럴 것입니다. 의인은 하느님이 무기력하시거나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참고 기다리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노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든 마음을 자신의 눈물과 희생으로 위로해드렸을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지혜 12,19).”
우리 하느님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비밀스럽게 하느님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당신 나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 사이로 우리들을 파견하십니다. 우리들이 파견되는 곳은 매일 악한 일들이 벌어지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비웃음, 냉대, 반대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마음을 바꾸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끝내 바꾸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연민과 그들이 돌아서기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인내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의인으로 성장해갑니다. 우리는 악과 악인의 기원을 알 수 없으나, 그들이 모두 돌아서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마음은 잘 압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가라지가 아니라 밀입니다. 악을 뿌리 뽑기 위해 그 기원을 캐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것과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악에 대한 생각은 그 자체로 유혹입니다. 구원의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은 또한 마지막 날에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시는 심판자이십니다. 그것은 그분만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날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불에 태워버리신답니다. 그러면 당신 밭에는 곡식알갱이가 잔뜩 달려 있는 밀만 남아 있게 되겠지요. 그 모습은 마치 구름 걷힌 맑은 가을날 빛나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마태 13,40-43). 의인은 그렇게 마지막 날에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 그들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되며 가슴이 부풀어 오르십니까? |
Alberione, alberione, Catholic, catholic, content, contents, Contents, contents.pauline.or.kr, gospel, Gospel, FSP, fsp, pauline, Pauline, pauline contents, 카톨릭, 가톨릭, 교리, 교리교재, 꿈나무, 바오로가족, 바오로딸, 바오로딸 컨텐츠, 바오로딸 콘텐츠, 바오로딸컨텐츠, 바오로딸콘텐츠, 복자 야고보 알베리오네 신부, 성바오로딸, 성바오로딸수도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바오로딸 수도회, 주일학교, 콘텐츠 바오로딸, 콘텐츠바오로딸, 알베리오네, 야고보 알베리오네, 이종훈, 이종훈 신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이종훈 마가리오 신부님, 마카리오 신부님, 마가리오신부님, 마카리오신부님, 마가리오 신부님, 마가리오, 마카리오, rio, Rio, 구속주회,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cssr, 강론, 강론말씀, 복음강론, 강론 말씀, 복음묵상, 복음 묵상, 복음 강론, 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영원한기쁨, 영원한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