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7월 29일(성녀 마르타) 연민, 하느님의 집

이종훈

7월 29일(성녀 마르타) 연민, 하느님의 집

 

수녀원 아침 미사를 위해서 새벽길을 운전해가다보면 이른 시간인데도 버스는 만원이다. 일용직 노동자 아저씨들은 길거리에서 자신을 실어갈 승합차를 기다리고 서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은 아저씨들, 감은 머리를 말리지 못해 고불고불한 파마머리의 아주머니들. 마음이 짠하다. ‘저분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 시간 빵 한 조각, 따뜻한 커피라고 한 잔 끓여 주며 작은 기운을 불어 넣어 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현실적인 벽이 너무 높아서 그저 마음뿐인 자신이 부끄럽고 그런 마음이 위선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는데, 앞에서 차들이 엉거주춤하며 차선을 바꾼다. 가만히 보니 저 앞에 폐지를 잔뜩 실은 손수레가 조심조심 길을 가로질러 힘겹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그 손수레를 지나치며 보니 등이 굽은 할머니가 손수레를 끌고 계신다. 그 할머니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찔리듯 아파오며 눈물이 고인다. 누가 저 할머니를, 누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일터로 향하는 이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 만일 우리 하느님이 훗날에 그들을 위로하며 반겨주지 않으신다면 나의 신앙도, 봉헌생활도, 사제직도 모두 헛되고, 흉측한 위선이 될 것이다. 아픈 마음과 눈물 고인 눈으로 주님께 그렇게 해주셔야 한다고 기도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분이 사람이 되셔서 당신을 보여주셨다. 보여주심이 목적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계심을 믿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서 움직인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셨던 일들이 바로 그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른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다(1요한 4,15-16). 믿지 않는 이들 안에는 하느님의 자리가 없어 그분이 머무르실 수 없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있을 수 없다. 

 

활동과 관상의 긴장 그리고 그 균형을 말할 때 흔히 마르타와 마리아를 비교하곤 한다.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를 잃은 슬픔 중에 그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마중 나갔지만, 그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르실 때까지 집에 그대로 있었다. 마르타는 움직였고, 마리아는 가만히 있었다. 마르타는 능동적이었고, 마리아는 수동적이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슬픔과 서운함을 표현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 예수님은 그와 대화를 주고받으시며 그녀를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끌어 주셨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7절).” 그 다음에 마리아를 부르셨다. 그녀가 언니 마르타와 다른 깊은 신앙을 지니고 있어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녀도 언니와 똑같은 마음으로 말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32).” 예수님은 마리아의 말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눈물에 마음이 북받치셔서 눈물을 흘리셨다. 라자로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끌어내셨고, 그것을 목격은 사람 모두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르타도 마리아도 예수님께서 이끌어주셔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믿는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를 자극하여 움직이게 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을 향해 지니는 연민과 눈물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고픈 마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를 자극한다. 영적인 삶은 정적인 삶이 아니다. 그 영이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면 그의 영성생활은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적인 배타적인 울타리를 뛰어넘어 자신을 탈출하게 한다. 그런데 자선과 봉사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 이끄시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은 보답, 칭찬, 보람을 기대하며 그런 일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의 이기적인 모습이다. 그런 이들은 바라던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 때 분노, 실망하며 그 일을 그만둔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영에 이끄심이었다면 그들은 그런 것들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단지 그 일을 하며 그분과 함께 있었음,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이 자신 안에 머무르셨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으로 만족한다. 우리 안에 마리아 관상, 마르타의 활동이 모두 필요한 이유이다. 그 한 가운데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은 연민이라는 집에 사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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