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8월 5일(첫 토요일) 하느님의 복통

이종훈

8월 5일(첫 토요일) 하느님의 복통

 

몇 년 전 이맘 때 복통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위를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이었습니다. 인간은 병에 걸리면 더욱 이기적이 됩니다. 오직 자신만 생각하게 되고, 오직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만을 찾습니다. 결국 119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로 가서 주사를 맞고서야 그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자비는 이런 복통과 같습니다. 애간장이 터지고, 미어지고,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 그것이 당신의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죄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당신이 느끼시는 고통입니다. 복통으로 괴로울 때는 오직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만 찾듯이, 하느님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끼셔서 그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주실 길만을 생각하십니다. 그런 인간을 도와주시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없구나(요한 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어쩌면 좋냐, 네가 어떻게 해 볼 수 없겠느냐?’, ‘어디서 포도주를 구해올 방법이 없을까?’라고 무엇인가 해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거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그 잔칫집에 질 좋은 포도주를 선사해주셨습니다. 

 

저는 이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거의 언제나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에 마음이 머무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삶의 기쁨, 인생의 맛,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을 상징하는 것 같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거리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서 늘 대하는 모습입니다. 무표정하고 찌푸린 얼굴이 그들의 삶이 진지함을 표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계처럼 오늘도 어제처럼 메마르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내가 사는 지, 일상이 나를 끌고 가는지 모르는 그런 삶입니다. 취미생활, 오락, 친구들과의 만나 먹고 마시기, 여행을 통해서 회복하려하지만 그 때뿐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잃어버린 걸까요?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찾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지쳐서 이제는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포기한 것 같습니다. 체념한 것입니다. 이제는 인생이라는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줄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가는 그곳으로, 일상이 이끄는 대로 무책임하게 자기 자신을 놓아 버린 것 같습니다. 나는 무감하게 지내지만 이를 지켜보시는 하느님은 애간장이 녹아나십니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빚어 만드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느님은 장난감이 필요해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장난감의 본질은 주인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기쁨을 잃어버렸는데 하느님이 기뻐하실 수 없음을 넘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래서 당장 달려가서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실 것이 분명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성모님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한 예수님의 마음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 혼인잔칫집의 포도주는 예수님이 어디에선가 가져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일꾼들이 가득 채워 둔 물이 질 좋은 포도주로 변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꾼들은 늘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 날도 다른 날처럼 무심히 또 빈 독에 물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도 다른 날처럼 물을 길었지만 예수님의 지시가 있어 달랐습니다. 같은 일을 했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메마른 일상이, 무한반복 재생되는 것 같은 삶이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된 데에는 예수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찾게 해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볼 때 나의 일상은 물론 죄마저도 그 의미를 찾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그 고통을 달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니 그분의 복통이, 그분의 자비가 우리 인생의 잔치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 자리에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아마 그 혼인잔칫집의 신랑도 포도주가 떨어지고 다시 채워지는 그 엄청난 사건을 몰라 과방장의 칭찬에 어리둥절했을 것 같습니다(요한 2,10).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성모님은 그것을 먼저 보시고 하느님의 복통을 유발하십니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네.’라는 노래가사가 떠오릅니다. 성모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시듯이 우리도 성모님처럼 나와 같은 어느 누구를 위해서 그를 대신해서 하느님의 복통을 유발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기뻐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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