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창세 1,26). 한 사람의 얼굴과 그의 삶 안에서 그를 낳고 기른 부모의 모습을 보듯이, 사람의 모습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눈, 코, 입 그리고 몸을 가지고 계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요한 4,24).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음은 사람이 영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영을 육신으로 표현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을 육신으로 보여 줍니다. 그 사람의 삶을 보면, 주어진 자신의 삶과 세상을 대하는 마음을 보면 그 사람의 영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입니다(요한 14,9). 하느님이셨던 그분의 육체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드셨고, 우리가 쓰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느님의 음식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분을 살게 했던 양식은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요한 4,34)”이었습니다. 그런 거룩한 욕망이 그분을 움직이게 했고, 사시면서 받으시는 어려움과 도전 그리고 죽음까지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깊은 감동을 받고, 삶을 바꾸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한심한 사람의 말이라고 여겨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분과 함께 살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그분을 너무 좋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분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공동체에서 밀어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여겼고, 어떤 사람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존재란 그의 능력과 재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많은 기적과 카리스마 넘치는 언행을 보여주셨지만,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행동과 증거는 역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입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6).” 그분의 영은 내어줌이었고, 내어줌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니(요한 4,24),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 그분의 영은 그분의 육체로써 온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 모습을 성경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고 표현했습니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기도하시며 하느님과 하나가 되셨고, 참 자아를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벗어나 그분은 참 하느님으로서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제자들도 그 영적인 현실을 목격했고 너무나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루카 4,33). 그들은 여전히 땅에 속한 이들이어서, 그분을 이 땅에 붙잡아 두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에 대해서 대화하고 계셨습니다(4,31). 제자들은 그분을 붙잡아 두고 싶어 했지만, 정작 그분은 이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나왔지만, 영적인 존재입니다. 영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영적 여행 중에 있습니다. 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하지만, 그런 중에 하늘나라의 기쁨을 맛보기도 하면서 그곳을 찾아갑니다. 재물, 건강, 우정 등이 우리에게 모두 필요하지만,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영입니다(요한 6,63). 그 영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분명 세상 속에서 세상 것들을 사용하며 살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영은 하늘나라를 염원합니다. 그곳이 그분의 집이고, 우리도 그곳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걸고 맺으신 계약의 완전한 표징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의 거룩한 욕망은 더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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