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동구 밖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사순제4주일)

이종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성찬례 중에 성체를 받아 모시기 직전에 환호하며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 전체를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라고 여기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스라엘이 오랜 세월 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탈출하기 직전에 맏배가 죽는 재앙을 피하고자 흠 없는 수컷 양(탈출 12,5) 한 마리를 잡아 그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그러면 죽음의 재앙이 그 집안을 그냥 지나갔고, 그 양고기를 먹으며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노예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린 양이 희생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의미는 바로 이 어린 양의 운명과 같았습니다. 죄인에게 죽음의 재앙을 피하게 해주고, 하느님께로 가는 먼 여행을 하기 위해 든든히 먹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하느님의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고 또 거짓입니다(요한1서 1,10). 굳이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성체를 바라보며 예수님은 그것을 없애시는 분이라고 환호하며 고백함은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 성체는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먹는 음식입니다. 고백하며 먹어서 우리 죄가 없어지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참으로 감하고 기쁜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냥 없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 해를 끼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도 상처를 입힙니다. 그런 죄와 그 결과들이 어떻게 없어지는 것입니까? 어렵고 복잡한 윤리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바닥에 국물을 쏟거나 화분을 떨어뜨려 깨뜨리면 누군가 그것을 치우고 청소해야 합니다. 그것을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서 더러워진 바닥이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어떤 영성가는 우리의 죄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서, 마치 블랙홀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려 없어지듯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 죄가 모두 없어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참 매력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너무나 큰 분이셔서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해 상처 따위는 그분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요?

 

쏟아진 국물로 생긴 얼룩과 흩어진 흙과 식물은 누군가 치우고 닦아야만 없어집니다. 우리의 죄와 그 결과는 누군가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없어집니다. 그것도 계속 반복되고, 세상 마치는 날까지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를 치르는 분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완전하고 영원한 대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 21).” 그분은 흠이 전혀 없는 어린 양이고, 완전한 희생제물입니다. 그분 덕에 의롭지 않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부당함을 깨달을수록 그리고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죄의 굴레에서 풀려나올 수 없음을 알수록 하느님의 희생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됩니다. 너무 송구해서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차마 고개를 들 수도, 감사하다는 말도 할 면목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기대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님 말씀(루카 15,11-32)에서 마음이 아프면서도 뭉클하게 하는 장면은 돌아온 둘째 아들을 껴안는 것보다는, 마을 밖에서 서성거리는 수심 가득한 늙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 바보 같은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의 무례한 요구와 행동을 막을 수도 없고, 그런 그의 미래를 예상하면서도 떠나가는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아버지, 그런 후에도 그가 몸만이라도 성하게 돌아오기를 기대하며 매일 동구 밖에서 걱정하며 서성거리는 아버지.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애초부터 불평등 계약이었으니,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도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화해라고 쓰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분께로 돌아감이라고 읽습니다. 하느님과 화해라는 잘못된 표현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어리석기까지 보이는 아버지의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분의 안타까운 마음, 몸만이라도 성하게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안에서 우리의 죄는 모두 없어집니다. 그분의 상처를 먹고 우리는 죄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됩니다. 이 땅에 분단민족은 우리나라뿐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도, 이 전쟁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날이 별로 없습니다. 요즘의 현실은 정말 안타깝고, 화도 납니다. 권한을 위임받은 몇몇 사람들에게 그에 합당한 권위가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동구 밖에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성한 몸으로 돌아온 아들을 두고 한없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 먼저 그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들에게도 같은 마음이 되기를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북의 화해는 서로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그리로 돌아감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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