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연중 21주일) 성체와 봉헌 그리고 자유
이번 주일도 또 요한복음 6장이다. 3주째 연속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님 족보(마태 1,1-17)만큼이나 강론준비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병자들을 치유하는 모습에 이어 노지에서 오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놀라운 체험을 했던 사람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을 따라왔다. 숨바꼭질을 하듯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모질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절).” 그런 면박을 당했어도 그들은 계속 예수님께 붙어 있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물었고(28절), 하느님의 빵을 늘 달라고 청했다(34절). 그것만 얻을 수 있다면 그 정도의 면박쯤은 당해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도 그 참된 양식이 당신의 살이고 그 참된 음료가 당신의 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꾸 진짜 살을 뜯어먹는 끔찍한 상상만 돼서 묵상을 할 수가 없다. 다른 때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알아듣기 쉽게 하늘나라 이야기도 잘 해주시더만 왜 이 중요한 성체에 관한 말씀에서는 그렇게 거칠게 말씀하셨을까? 그 덕분에 당신에게 빠져 끌려왔던 제자들이 거의 다 되돌아가버렸다. 어쩌면 당신이 친히 선택한 열두 명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눔, 사랑, 자비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설명하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은 나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떨어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밑에 교묘히 숨어 있다. 성공하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이다.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끌어 모으는 것은 당신의 선교사명과는 거리가 멀었나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당신의 비유말씀을 모든 사람이 다 이해하기를 기대하시지 않았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아니 알고 싶어 하는 사람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사람들만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나보다(요한 6,44; 10,27). 거기에 모여든 사람들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사명이 있었다. 그것은 그 듣기 거북한 당신의 그 말씀 안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당신이 친히 선택한 열두 제자들이 떠나더라도 그렇게밖에 달리 표현할 방식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요한 6,64). 그런 이들에게 그 거북한 말씀을 비유도 아니고 어떤 설명도 없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당신 살을 먹고 당신 피를 마셔야 한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바로 직전에 제정되었다. 거기에는 죽음의 향기가 깊게 배어있다. 이 세상에 사실 때는 인성 속에 신성을 감추시더니 이제는 한낱 빵 속에 그 인성마저 감추셨다. 그 다음은 그 빵마저 치우시려나? 인간의 육체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누룩 없는 빵이 아무리 오래간다 해도 그 또한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당신의 영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하늘로 오르셔야 했다. 다시 말해 돌아가셔야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1-63절).” 영성체로 예수님의 영을 받는다. 그 영은 우리를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게 해서 이웃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살게 한다. 인성에 가려있던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고 그분이 보시던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수십 년 성체를 받아 모셨어도 예수님의 그 말씀이 듣기 거북하게 들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이끄는 길을 가지 않음, 내어주기를 거부함이다. 죽어야 비로소 영원한 세상이 보이고 예수님의 살과 피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흥분해서 예수님께 달려왔던 이들, 그들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들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었다면 우리는 그분을 따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시련과 죽음을 예고하셨다. 이리 떼 속에서 어린 양처럼 살아가려니 당연하다. 성체성사는 복을 기원하고 악귀를 쫓는 굿이 아니다. 그 기원에 예수님의 죽음과 봉헌이 배어 있으니 그분을 받아 모시는 이들의 삶도 그와 같을 것이다. 미사 지향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이 보일 리도 그 말씀이 들릴 리도 없다. 성체성사는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은 이웃을 향해있다. 그것은 자아라는 감옥에서 해방이고 거짓자아라는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이다. 철저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 답답한 자아와 육체를 탈출해서 저 멀리 저 높은 하늘로 오르게 하는 하느님의 빵이다. 그렇게 영원히 살게 하는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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