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12월 1일(첫 토요성모신심) 술이 떨어졌을 때

이종훈

12월 1일(첫 토요성모신심) 술이 떨어졌을 때

 

김장철이 되니까 수녀님들이 저희 집은 김장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 물음 안에는 수녀님들이 담근 김장김치를 나눠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네 김장 담그셨잖아요.”하고 대답해서 서로 웃습니다. 비록 그런 염치없는 대답을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왜 부끄러울 줄 모르겠습니까? 맛있는 음식 만들어 나눠주고 싶고, 좋은 집이 있어 지치고 상처받고 메마른 영혼들을 초대해 거기서 쉬며 주님께 진정한 위로와 치유를 받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매 번 얻어먹기만 하고 도움만 받는 것 같아 민망하고 속상합니다. 오십 대가 되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아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라고 합니다. 멋진 말이지만 정말 그냥 멋진 말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 묵상 성찰을 하며 잘 살려고 노력해도 맨 날 그 자리인 것 같습니다. 삶이 선물이고 축복이며 축제라는 말이 믿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해주셨지만 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언제나 선포하지만 저 자신도 그렇지 못하니 그 외치는 목소리만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과 우리 실제 삶이 분리된 느낌입니다. 믿음이 기쁨과 삶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 말씀대로 살면 삶이 풍요해짐을 알면서도 그렇게 못하니 참 답답합니다.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싶은데 솔직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잘 알지 못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면 되는 건지, 성경만 읽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성당 일에만 열중하면 되는 건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살 수도 없거니와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큰 잔칫집에 술이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갈릴래야 카나의 한 혼인잔칫집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요한 2,3). 그 난감한 사정을 알아챈 분은 성모님이셨습니다. 복음서도 그 잔칫집에 성모님이 계셨음을 먼저 알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초대받았다고 적었습니다(요한 2,1-2).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한다는 이론이 여기에도 적용된 것 같습니다. 성모님은 그 어려운 숙제를 아드님께 전해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당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성모님은 일꾼들에게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언뜻 보면 막무가내 같아 보이지만 거기에는 성모님의 깊은 연민과 사랑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절박한 잔칫집 주인의 딱한 사정을 당신의 일로 떠안으셨고, 아드님을 완전히 신뢰하며 그 어려운 숙제를 그분께 맡겨드렸습니다. 그리고 처음 것보다 더 좋은 술이 항아리 가득 생겨났고 잔칫집의 흥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처럼 삶의 의미와 기쁨이 사라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비록 하느님 보시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할지는 몰라도 엉망으로 살지 않았고 나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 같은데, 왜 이런지, 왜 흥이 나지 않는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왜 자꾸 어려운 숙제만 주어지는 지 도무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카나의 그 잔칫집에서 일꾼들은 정결례 때에 쓰일 물을 담아두는 독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때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밍밍한 물이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더 열심히 살아도 여전히 흥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손님들에게 퍼가자 그것은 좋은 술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성모님도 모르셨을 겁니다. 그분은 그저 믿기만 하셨을 겁니다, 아드님이 반드시 축제의 흥이 깨지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고. 그리고 함께 갔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2,11). 유다인들의 혼인잔치는 며칠 씩 이어졌다고 하니 술이 많이 필요했을 겁니다. 인생은 숙제가 아니고 축제이고, 이벤트가 아니고 하나의 긴 여행입니다. 그 축제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여행의 끝은 하느님의 집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여행길을 가지만 각기 혼자서 걷습니다. 그 외로운 여행길을 성모님이 함께 걸어가시며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분은 나의 잔치에 술이 떨어진 것을 알아채시고 예수님께 말씀드리실 겁니다. ‘이 집에 술이 떨어졌구나.’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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