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신부의 영원한 기쁨

[이종훈] 4월 23일(부활팔일축제 화요일) 작고 여린 목소리

이종훈

4월 23일(부활팔일축제 화요일) 작고 여린 목소리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장면들 앞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내 머리는 하얀 백지 상태가 된다. 전혀 모르는 전문서적을 읽어도 이 정도는 아닐 것 같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천사를 만나고도 놀라지 않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어떤 이는 마리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억지스럽다. 그런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물 때문이 아니라 죽음, 슬픔, 죄책감, 심판에 대한 두려움 등이 마음을 덮어 아드님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분을 무덤에서 찾았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 세계는 딱 거기까지인 걸 어쩌겠나? 죽음 이후에는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 부활은 온전히 하느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죄 없는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자책, 죄책감, 뉘우침, 통회, 새로운 결심 등 죄와 성찰과 연관된 모든 내적 행위들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우리의 이해는 거기까지이다.

 

주님께서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하고 마리아를 부르셨을 때 마리아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마리아야!(요한 20,16)”하고 부르실 때는 그 즉시 주님을 알아보았다, 양이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처럼(요한 10,27). 주님은 나를 부르신다. 그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그 죄인을 사랑하신다.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요구하지 않으셨다. 단지 믿으라고만 하셨다. 주님은 죄를 물으신 적도 죄의 고백과 뉘우침을 요구하신 적도 없다. 그냥 치유하시고 용서하셨다. 왜? 불쌍하니까. 괴로워하고 울거나 심판을 두려워하는 거밖에 모르는 우리가 당신 눈에는 참 딱하고 불쌍하게 보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마음은 나의 간절한 바람과 상상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느니 믿는 게 훨씬 좋겠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주님, 주님은 죽음을 건너가셨습니다. 저는 건널 수 없지만 이런 저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거기를 건너갑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저를 부르시는 작고 여린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온갖 죄책감과 자책, 불안과 두려움으로 시끄러운 제 안을 조용하게 만들어주소서. 그래야 그 구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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