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sunshine

Seven victories 칠극

 ' Seven victories'  칠극

 

Patience, charity, diligence, humility, chastity, kindness and temperance! These are “the seven virtues” that we try to practice in our lives. On the contrary, wrath, avarice, sloth, pride, lust, envy and gluttony are regarded as “the deadly sins” that we have to overcome.

A new translation of “The Seven Victories” (De Septem Victorias) has been published by kimyoungsa as a guide to the seven reflections to control the mind. It was originally written in Chinese in 1614 by Diego de Pantoja (1571-1618), a Spanish Jesuit who went to Beijing with the Italian Jesuit Matteo Ricci (1552-1610) in 1601.

With the Chinese name Pang Diwo, Pantoja was one of the closest collaborators of Matteo Ricci, but he was expelled from China in 1617 as a result of the increasing tension between the Chinese imperial court and the missionaries. He died in Macao at the age of 47.

Regarding the seven deadly sins and the seven victories (mortifications), this book became one of the first Catholic catechisms in the Joseon Kingdom.

“Seongho” Yi Ik (1681―1763), a Korean Neo-Confucian scholar and Silhak philosopher wrote that “The Seven Victories correspond to the Confucian theory of self-overcoming, which is enormously helpful in overcoming one’s desire.”

In this way, “The Seven Victories” is still valid for contemporary Christians. Hong Yu-han is the first lay ascetic in Korea who practiced the seven victories.

He was born in 1726, the 2nd year of the reign of King Yeongjo, into the clan of the Pungsan Hong in the Joseon Kingdom (1392-1910). His official name was Seongmun, but his pseudonym or nickname was Nongun. In 1742 (at age 16), he studied under the guidance of Yi Ik at the recommendation of his father.

From 1757, although he was not baptized, he started a religious life by himself and practiced the seven virtues by overcoming the seven sins. When he was unable to lead such a life due to various circumstances, he moved to the foot of Sobaek Mountain in 1775 to practice the seven victories until his death in 1785 at the age of 60.

At that time, there was no liturgical calendar or prayer book, but he knew that Sunday came every seven days. So he devoted himself to prayer, avoiding all worldly affairs on the 7th, 14th, 21st, and 28th of each month. He also didn’t know anything about abstinence, but he restrained his instinctive greed by making it a rule not to eat the best food. When eating food, he always left half of it.

When lowly people bowed to him, he also respected them. Without any private affection, he treated others as one body. When he met an old or sick person on the road, he got off his horse and gave it to him. Without any discrepancy, he didn’t change his mind about what he gained or lost. He quietly and joyfully accepted unexpected transgression, and he was ashamed to expose the faults of others. After the age of 30, he completely abstained from a sexual life. And in spite of his chronic illness, he did not recline or lie down early unless it was time to go to bed.

Such a faithful passion became a stepping stone to the founding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in 1784. Together with 13 descendants who became martyrs, his holy shrine is located at Ugokri in Andong.

    


‘칠극’

인내, 사랑, 근면, 겸손, 정결, 관용, 절제! 이는 우리가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일곱 가지 덕행”이다. 한편 분노, 인색, 나태, 교만, 음욕, 시기(질투), 탐욕(탐식)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칠죄종”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7가지 성찰의 지침서인 “칠극”(The Seven Victories/ De Septem Victorias)의 새 번역본이 김영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원래 1614년 디에고 데 판토하(1571-1618)가 중국어로 쓴 것이다. 판토하는 1601년 이탈리아 예수회 마테오 리치(1552-1610)와 함께 베이징에 간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다.
 
방적아라는 중국 이름을 지닌 판토하는 마테오 리치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중국 황실과 선교사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자 1617년 중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47세에 마카오에서 선종했다.

칠죄종과 칠극(고행)에 관련된 이 책은 조선 왕국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의 성리학자요 실학자인 “성호” 이익(1681~1763)은 “칠극은 유교의 자기극복론에 해당하며, 개인의 욕망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썼다.

이처럼 “칠극”은 현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홍유한은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수덕자로서 칠극을 몸소 실천했다.

그는 영조 2년, 1726년, 조선 왕국(1392~1910) 풍산 홍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성문이고 호는 농은이었다. 1742년, 16세에 아버지의 권고로 이익의 지도 아래 공부했다.

그는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1757년부터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칠죄종을 다스리며 일곱 가지 덕행을 실천했다. 여러 상황으로 인해 덕스러운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없게 되자 그는 1775년 소백산 자락으로 옮겨 가 1785년 60세에 선종할 때까지 칠극을 실천하며 살았다.

그 당시에는 전례력이나 기도서가 없었지만 그는 7일마다 주일이 온다는 것을 알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이면 세속적인 일을 모두 피하고 기도에만 전념했다. 그는 또한 금육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지만 가장 좋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아 본능적 탐욕을 다스렸다. 음식을 먹을 때도 언제나 절반을 남겨 두었다.

비천한 사람들이 그에게 절을 하면 그 또한 묵례했다. 그는 사사로운 정을 지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한 몸으로 여겼다. 길을 가다 어르신이나 병든 사람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그 말을 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어긋남이 없어 얻음과 잃음 앞에서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고, 무리한 처사라도 묵묵하고 기쁘게 받아들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30세 이후에는 성생활을 전폐했다. 고질병이 있었지만 잠자리에 들 때가 아니면 어디에 기대거나 일찍 눕지 않았다.

이처럼 충실한 열정은 1784년 한국 천주교 창립의 디딤돌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성지는 13위의 후손 순교자들과 함께 안동 우곡리에 있다.

 

- The Korea Times/ Thoughts of the Times/ October 3 (online), 4 (offline),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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