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sunshine

Fr. Anthony Collier 안토니오 콜리어 신부

Fr. Anthony Collier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I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15:13, Jesus says that laying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is the greater love.

A good example of laying down one’s life for others is that of Saint Maximilian M. Kolbe, a Polish priest and Conventual Franciscan friar who volunteered to die for a stranger in the German death camp of Auschwitz during World War II.

When I recently visited Soyangno St. Patrick’s Catholic Church for the Pauline mission, I became acquainted with another example of laying down one’s life for parishioners during the 1950-53 Korean War.

He is Fr. Anthony Collier who was born in Clogherhead, County Louth, Ireland on June 20, 1913. He joined the Columbans in 1931 and was ordained on December 21, 1938. In 1939, he was sent to Korea as a Columban Missionary (a member of Missionary Society of St. Columban) and served as an auxiliary priest at Imdangdong and Hoengseong parishes in Gangwon Province.

In January 1950, he was assigned to Soyangno parish which was established as the second Catholic Church in the diocese of Chuncheon. Then, unfortunately, he was killed by North Korean forces on June 27, 1950, during the Korean War. Thus, he became the first martyr of that conflict.

Chuncheon is a city surrounded by beautiful lakes (Lake Soyang and Lake Uiam) but located close to the 38th parallel, a symbol of division. It was the place where the first fierce battle took place during the Korean War.

Fr. Anthony Collier served at Soyangno parish for six months only, but his dedication is remembered to be a good example of giving out his life for others. He volunteered to die for Gabriel Gyeong-ho Kim, an altar server and catechist at the parish. Fr. Anthony let Gabriel be alive because he had a family.

Gabriel gave an eyewitness account of the martyrdom of Fr. Anthony Collier: “They proposed covering his eyes, but Father refused. They shot him in the back. … They fired five times and the first, fourth, and fifth shots were aimed at Father. It was about two o’clock in the afternoon. Father fell down without any words. … I lost consciousness when the Red Army left the place. When I first regained consciousness, Father was still breathing, and the sun was still high. When I came to my senses again, he had stopped breathing, he was covered with a straw mat, and the sun was setting. There were bullet wounds on Father’s face and arm.”

In 1953, Fr. James Buckley was appointed as the third pastor of Soyangno parish and was asked to build a church in memory of Fr. Anthony. With the help and support of friends and benefactors, Fr. James completed the church building in a semi-circular interior with no supporting pillars inside and dedicated it on September 3, 1956.

With a modern architectural design, Soyangno parish was designated as a Registered Cultural Property No. 161 in 2005. The pews inside are arranged in a fan shape with the altar at the center.

The “Peace pilgrimage route” in Chuncheon starts from Soyangno parish, passes through Nakwon Cultural Park where Fr. Anthony was martyred, and ends in Jukrimdong Cathedral where the parish martyr cemetery is located.

- The Korea Times/ Thoughts of the Times/ November 2 (online), 3 (offline), 2021-


안토니오 콜리어 신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훌륭한 귀감은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 독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낯선 수감자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 놓은 폴란드인이자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사제였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의 경우다.

최근 바오로딸 선교를 위해 소양로 성 파트리치오 성당을 방문했을 때 나는 1950-1953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당시 본당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또 하나의 사례를 알게 되었다.

그는 1913년 6월 20일 아일랜드 라우스 주 클로거헤드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콜리어 신부다. 그는 1931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들어가 1938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39년 그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되었고 강원도 임당동 성당과 횡성 성당에서 보좌 신부로 지냈다.

1950년 1월, 그는 춘천교구에 두 번째로 설립된 소양로 성당에 부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50년 6월 27일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전쟁이 빚은 갈등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춘천은 소양호와 의암호 같은 아름다운 호수로 둘러싸여 있지만 분단의 상징인 38선에 가까운 도시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최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안토니오 콜리어 신부는 소양로 성당에서 6개월 동안 사목했지만 헌신적이었던 그는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좋은 본보기로 기억된다. 그는 성당 복사이자 교리교사였던 김경호 가브리엘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가브리엘에게 가족이 있었기에 안토니오 신부는 그가 살아남게 했다.

안토니오 콜리어 신부의 순교를 목격한 가브리엘은 이렇게 증언했다. “그들은 신부님에게 두 눈을 가리라고 했지만 신부님은 이를 거절하셨다. 그들은 신부님을 등 뒤에서 쐈다. ... 그들은 다섯 발을 발사했는데, 첫 번째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총알은 신부님을 겨냥한 것이었다. 때는 오후 2시쯤이었다. 신부님은 말없이 쓰러지셨다. … 인민군이 그 자리를 떠났을 때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내가 의식을 되찾았을 때 신부님은 여전히 숨을 쉬고 계셨고 태양은 여전히 밝게 타올랐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신부님은 이미 숨을 거두셨다. 신부님은 짚멍석에 덮여 있었고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신부님의 얼굴과 팔에 총상이 있었다.”

1953년, 제임스 버클리 신부가 제3대 소양로 본당 사제로 임명되어 안토니오 신부를 기리는 성당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친구들과 은인들의 도움과 후원으로 제임스 신부는 내부 기둥이 없는 반원형 양식의 성당을 완공하여 1956년 9월 3일 봉헌했다.

현대 건축 양식의 소양로 성당은 2005년 국가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내부 회중석은 제단을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다.

춘천의 ‘평화 순례길’은 소양로 성당에서 시작하여 안토니오 신부가 순교한 낙원문화공원을 지나 춘천교구 순교자 묘역이 있는 죽림동 성당에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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