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sunshine

Passion of Lee Jung-seop 이중섭의 열정

Passion of Lee Jung-seop

During summer vacation, I walked along several parts of the Olle Trail in Seogwipo on Jeju Island with a retired professor and two elder sisters. One of the most interesting paths was Lee Jung-seop Street, made in memory of the artist, Lee Jung-seop (1916-56). Walking every corner of his street, I could feel his passion, creativity, loneliness, longing, wandering and dedication.

Because he had stayed in a tiny room in Aljari Dongsan, now called Lee Jung-seop Street, in Seogwipo, for about a year, many things along the street are related to his paintings. The sidewalk blocks and sculptures are also inscribed with some images of his creative and inspiring paintings, such as crabs, fish, cows, birds, oranges, naked boys and a woman.

Born into a wealthy family, he dreamed of becoming a painter when he met Lim Yong-ryeon, a drawing teacher at Osan High School. In 1936, he went to Tokyo to study art at the Imperial Art Institute. In 1937, he entered Bunka Gakuen, a three-year private school at the time, and started dating a Japanese woman named Yamamoto Masako in 1939.

In 1943, he came back to Korea, and in 1945, Masako also came to Korea. They were married in Wonsan. However, with the outbreak of the Korean War in 1950, his family had to leave Wonsan. His family took refuge in Busan for about a month and then fled to Seogwipo early in 1951.

Refugee life in Seogwipo was so miserable that they used to catch crabs and fish to eat at the nearby seashore. He felt so sorry for catching so many crabs and fish to eat that they became a subject of his paintings. The couple was poor but most happy together. Therefore, in spite of the hardships of refugee life, their life in Seogwipo was portrayed as an idyllic dream and happy.

However, due to extreme poverty, his wife and two sons had to go back to Japan in 1952. Being left alone, he worked hard and drank a lot as well.

Thanks to his friends, he managed to get a sailor identification card and met his family for about a week in Japan.

In the end, he died from hepatitis and malnutrition. One of the marvelous things about him is that he kept painting despite the many ordeals he went through in his life. Whenever he could, he tried to draw or paint pictures. Whether in the corner of a coffee shop or on a block of wood in a bar, he kept drawing.

He didn’t have a canvas or a sketchbook, but he had a passion for drawing and painting. He used plywood, a sheet of paper and the tinfoil linings of cigarette packs. He didn’t have paintbrushes; he drew with a pencil or a n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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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imes he did not have enough food to eat. He had no comfortable place to stay. He was lonely and almost desperate because he couldn’t meet his beloved family. Nevertheless, he had a passion and didn’t stop drawing and painting. He kept painting in spite of such a miserable situation.

Pondering the brief span of his life, I think the secret of happiness or success is passion. Passion has a double meaning: passion as enthusiasm or zeal and passion as in the suffering and death of Jesus Christ. This double meaning of passion has a common driving force: dedication. Dedicated passion goes beyond obstacles and always gives us creative inspiration.

- The Korea Times/ Thoughts of the Times/ July 26 (online), 27 (offline), 2022 -


이중섭의 열정

여름 휴가를 맞아 은퇴하신 교수님과 두 언니와 함께 제주도 서귀포 주변 올레길을 걸었다. 가장 흥미로운 길 가운데 하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을 기리기 위해 만든 이중섭 거리였다. 그 거리 구석구석을 걸으면서 나는 이중섭의 열정과 창의력, 외로움과 그리움, 방황과 헌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은 서귀포 이중섭 거리라 불리는 알자리 동산의 작은 방에서 1년 정도 머물렀기에 그의 거리에 진열된 많은 것들이 그의 그림과 관련된다. 보도 블록과 조각물에는 게와 물고기, 소와 새, 귤, 벌거벗은 소년들과 여인처럼, 창의적이며 영감을 주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새겨져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오산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임용련 선생님을 만나 화가의 꿈을 꾸었다. 1936년, 그는 도쿄로 가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1937년, 그는 당시 3년제 사립학교인 분카 가쿠앤(문화복장학원)에 입학했으며, 1939년에는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인 여성과 사귀기 시작했다.

1943년, 그는 한국에 돌아왔고, 1945년에는 마사코 또한 한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원산에서 결혼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을 떠나야 했다. 그의 가족은 거의 한 달 동안 부산에 피신했다가 1951년 초 서귀포로 피난을 갔다.

서귀포에서의 피난민 생활은 무척 처참하여 인근 해변에서 게와 물고기를 잡아 먹으며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는 수많은 게와 물고기를 잡아먹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게와 물고기를 그림의 소재로 사용했다. 그들 부부는 가난했지만 함께 있는 것이 가장 행복했다. 그래서 고달픈 난민생활 속에서도 서귀포에서의 삶을 평온하고 행복한 꿈처럼 그렸다.

하지만 극심한 빈곤으로 인해 아내와 두 아들은 1952년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홀로 남겨진 채 열심히 일했으며 술도 많이 마셨다.

친구들 덕분에 그는 가까스로 선원 신분증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일주일 정도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간염과 영양실조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가 지닌 놀라운 모습 가운데 하나는, 그는 삶 가운데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다방 구석에 있든 술집의 나무 블록에 있든 그는 한결같이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는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 그리하여 합판, 종이조각, 담뱃갑 안에 있는 은박지를 사용했다. 그는 붓이 없었기에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때때로 그는 먹을 음식이 충분하지 않았고, 편안하게 머물 곳도 없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없어 외로웠고 몹시 절박했다. 그럼에도 그는 열정을 지닌 채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그처럼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그의 짧은 생애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 행복이나 성공의 비결은 패션(passion,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정열 또는 열망으로서의 패션(열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나타난 패션(수난)이다. 패션의 이중적 의미에는 공통적 원동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헌신이다. 헌신적 열정은 장애물을 뛰어넘어 언제나 창의적 영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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