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베케트(St. Thomas Becket) 대주교,순교자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노르만의 후손이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총명하던 그는 파리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주교 밑에서 일을 하다 다시 유학하여 볼로냐 등지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고국으로 돌아와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으며, 37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도 관여하였다.
1161년 주교가 서거하자 왕이던 헨리 2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토마스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주교로 임명되자마자 바로 수상직을 사직하고 수도자처럼 검소하게 살고 사목에 최선을 다했다.
국왕은 교회에 간섭하며 토마스에게 자신과 타협하며 살 것을 권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토마스는 교회법원과 교황청 상소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주교들이 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소위 '클라렌든 법'을 거부하여 헨리 8세와 반목하다가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목자 없는 양 같은 자신의 신자들을 위해 위험이 기다리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왕은 “저 불쾌 막심한 장애물같은 주교를 치워줄 자는 없는가!” 라고 성인을 못마땅해 했고, 결국 성인은 캔터베리 성당에서 저녁기도를 드리던 중 왕의 측근 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성인은 “주님,제 영혼을 당신께 맡깁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교회를 위하여 저는 기꺼이 죽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많은 이들이 성인의 순교를 애통해하였다. 교황은 이 사건 직후 헨리 2세를 파문했고,왕은 공식으로 그의 무덤 앞에서 통회하고 교황에게 복종할 것을 서약하였다.
자칫했으면 영국 교회가 이 때 로마 교회와 단절될 뻔했던 사건이었다. 3년후 토마스 베케트 대주교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훗날 헨리 8세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에서 떨어져 나갈것을 선언했으며, 토마스 베케트 성인의 무덤을 열고 유해를 흩어 버렸다.
- 출처: 성바오로딸수도회 성인찾기(https://fsp.pauline.or.kr/?c=saint&m=find)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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