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9월 6일 착한 마음과 십자가의 길
내 안에는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이 함께 있다. 착한 마음은 내가 하느님을 닮았으니 있는 것이겠고 나쁜 마음은 어떻게 내 안에 있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쁜 마음의 기원을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걸 안다고 그것을 안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이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마주하셨다. 나도 그러한데 예수님은 얼마나 그를 회복시켜주고 싶으셨을까. 하지만 모두가 같은 마음이 아닌가 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분이 하느님이어서가 아니라 웬만한 어른이면 그런 의도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나 같으면 모르는 척했다가 나중에 그를 따로 불러 도와줬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착한 마음의 기운을 통제할 수 없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루카 6, 9)”
그 질문의 답을 모를 사람은 없다. 예수님이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은 이미 당신이 하실 일을 결정하셨고, 그들도 당신에게 동의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분에게는 우리처럼 숙고하고 저울질하는 과정 자체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분 안에는 착한 마음만 있었을 테니까.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는 명령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그냥 아는 것 같다. 예수님에게는 착하고 좋은 마음만 있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나쁜 마음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거기에 동의하거나 안 하는 건 나의 몫이다. 그 기원을 캐려고 하면 그것과 더 친해지게 되니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내가 가진 남들과 다르거나 혹은 부족한 신체조건과 같은 걸지 모른다. 나쁜 마음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 오히려 그것에 걸려들 테니 그냥 들어주기만 하고 행동은 좋은 마음을 따른다. 그리고 좋은 마음을 따르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바람을 갖지 않는다. 그런 근거 없는 바람을 가지면 금방 실망하게 되고 나쁜 마음과 친해지게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이미 다 보여주셨듯이 좋은 마음을 따라가면 십자가의 길로 걷게 된다. 그 길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난다.
예수님,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모자란 환란을 채우고 있다고(콜로 1, 24)’ 말한 것은 주님의 수난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도 인류 구원을 위해서 수난하시는 주님과 함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살아 있으니 고통도 있고 기쁨도 있는 법, 십자가 길에서 주님과 함께 착한 마음을 따르는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들은 아드님을 안아주셨으니 그 사랑으로 주님의 길을 따르려는 모든 이들을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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